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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후기

[6월12일 강의후기] 우리, 안녕한가요? 세월호 참사가 건넨 질문

우리, 안녕한가요?

세월호 참사가 건넨 질문 -인간의 존엄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으로-

 

612일 금요일, 2015고양인권학교가 시작됐다. 그 시작을 미류(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가 열었다. 최근까지도 세월호참사 국민대책위에서 활동을 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미류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인권이라는 단어를 자주 이야기하지만 이제 인권이라는 말이 없이 뭔가를 해야 하는 시간을 보낸 경험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며 조심스럽게 강의를 열었다.,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가 보았던 것을 되새겨 보자. 언론에서는 실종자 와 사망자 와 생존자 를 연신 내보냈다. 하지만 우리가 슬퍼하고 분노했던 것은 가 아니었다. 진실에 이르기 위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을 가로막는 경찰을 보았다. 누군가는 모욕과 혐오를 인터넷 등에서 표출하고 있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죽음에 돈을 셈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 참사의 자리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회가 무너진 경험을 담은 참사는 우리와 익숙했던 감각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기준을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익숙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기준을 세워야 하는 상황, 이런 경험에서 인권선언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1948년을 돌아보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다. 전쟁 자체의 충격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학살하거나 인간 이하의 대우를 하는 일 등이 체계적이고 당연하게 이루어진 경험 속에서 인권선언이 이루어졌다.

세계인권선언 1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 났으며 서로 동포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모든 사람이 존엄해지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리스 로마 시대의 노예들에게, 짐승들과의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사람들에게도 인간의 존엄함이 적용되었을까?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왜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권리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의 존엄성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저 언제나 존엄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요청이다. 모든 인간의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회 속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요청이다.

여성의 권리, 성수자의 권리, 장애인의 권리, 그리고 어린이의 권리 등을 이야기하는 데는 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주장할 수 있는 권리들의 확대, 이것이 바로 인권의 역사성이다.

세계인권선의 마무리에 이런 문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이 선에서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하게 실현될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 우리의 권리가 보호되거나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권리를 가진다는 뜻이다. 만약 질서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 질서를 바꿔야 한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수많은 법과 제도들이 바로 그 질서다. 이 질서들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역시 인권의 눈으로 봐야 한다. 

세월호 참사 실종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많은 민간잠수사들이 투입되었다. 그 중 민간잠수사 두 분이 돌아가셨다. 한 분은 업체에 고용된 사람이라 산재처리가 되었지만, 다른 한 분은 자원활동을 하셨던 분이라 아무런 보상이 없었고 의사자 지정 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에 검찰은 민간잠수사를 살인에 이르게 한 죄로 다른 잠수사를 기소했다. 한편,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는 민간잠수사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구조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민간잠수사들이 최선을 다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바로 건강과 안전이다. 이것은 민간잠수사의 권리이기도 하며 하루라도 빨리 시신을 찾는 것은 유가족의 권리이기도 하다. 이렇게 권리들이 맞물려 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권리가 서로 의존적이기보다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인권의 상호의존성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에게 어떤 질서가 필요한지 상상할 수 있다.

이처럼 인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존엄성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것에서 모두의 것으로, 해명해야 할 것에서 약속해야 할 것으로, 인간 존엄성이야말로 인권의 기초, 출발점이며 아직도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바꾸어나갈 목표이기도 하다.

 

이런 일이 다시 없도록’ –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지?

이것의 출발점 역시 인간의 존엄이다.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정부, 세월호 참사를 기본적으로 사고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사고와 사건은 무엇이 다른가? 사고는 처리해야 하지만 사건은 해결해야 한다. 정부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처리만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그것을 밝히고 달라져야 비로소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다.

돈벌이에 여념 없는 기업에 대한 분노도 있다. 세월호는 하루 아침에 침몰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침몰했다는 많은 증언들과 증거가 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 역시 검찰 조사에 따르면 2년 전부터 붕괴조짐이 있었다고 한다. 당일아침 천장에서 물이 새기 시작해 임원들에게 보고했고,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으나 그 회의에서 문제 없으니 계속 영업하라는 결정이 났고, 삼풍백화점은 붕괴되었다. 삼풍백화점 측은 사람들이 죽은 것도 피해지만 (백화점 측) 재산도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를 해서 국민들을 더욱 경악하게 했다. 세월호 참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윤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생명보다 돈이 중요하게 둘 수 없다.

세월호 참사를 오보하거나 악의적으로 보도하는 언론들이 넘쳐났다. 지금의 언론은 권력의 눈치를 보기보다 그런 권력을 함께 만들고 있다. 또한, 세월호 선장에게 살인죄가 선고 되었다. 퇴선하라고 명령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퇴선하라고 명령했으면 세월호 참사를 우리가 겪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는가? 아무도 그렇게 상상하지 않는다. 굉장히 많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있기에 분할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서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구조가 있었다고 말한다. 구조적 문제가 뭘까.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을 국가의 체계적이고 계획된 친권침해로 기억하고 있다. 국가가 하면 안될 일을 했다는 것에서 인권의 감각이 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구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지난 해경과 관련된 예산을 보면, 재난구조 인프라 확충에 필요한 예산이 청사신축 등에 들어가는 예산보다 훨씬 적었다. 국가는 이 때 국가가 해야 하는 능력을 버렸고, 능력을 만들지 않았다. 정부의 작위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이것이 인권침해라는 것을 모른다. 국민은 불안하게 살 수 없다고 이야기했고, 정부도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규제완화는 계속 되었다. 정부가 내놓은 안전대책은 안전보험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보험회사의 규제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들을 우리는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영향을 미치는 순간들이 구조적 문제로 다가온다.

규제를 완화할 때 우리는 가만히 있었는가? 누군가는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하며 싸웠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그것이 우리의 권리로 보이지 않는 매커니즘이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표적인 인권침해는 집회에서의 경찰의 등장과 과잉진압이다. 하지만 싸우는 사람들을 막는 것은 경찰의 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싸우는 사람들을 이기적이다.’ ‘종북이다,’ 라고 내몰며 우리와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종북세력을 이 사회 속에서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때 문제를 말하고 싶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사람의 목소리를 왜곡하고 지우는 국가의 폭력 그리고 사람들은 약자에게 분노를 쏟아 붓고 누군가를 배제하는 모욕과 혐오에 익숙해져 있다.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사회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세 모녀를 기억하는가. 이 죽음을 보고 박근혜대통령은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있는데 왜 죽었냐고 이야기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개정을 요구했지만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고, 세 모녀는 죽음을 택했다. 지금의 사회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당신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하며 죽게 내버려두고 있다. 과거에는 최루탄이나 고문 등 사회적 타살을 시대적 죽음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엔 다르다. 살 수 없게 만들어놓고 못 사는 건 네 책임이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 누구도 구조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인권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인권의 보편성, 상호의존성 그리고 상호불가분성을 기억하면서 인권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 “누가 이 사회에서 인간으로 간주되고 있는가, 누구의 삶이 삶으로 인정되고 있는가, 무엇이 애도할만한 삶으로서 중요한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인간의 존엄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각자 다른 특징을 갖고, 각자의 위치에서 경험한 삶이다르기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건, 그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우리는 모두 근본적으로 동등한 사람들이라는 공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공감하는 사람들은 어떤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항상 어떤 피해들이 일어나고 나서 행동한다. 피해자들이 뭔가 주장할 때 그이들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요구 한다고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요구하는 것이고, 우리 모두의 권리를 빼앗겼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이다.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동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평등하게 추구해야 할 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피해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문제를 먼저 알게 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피해를 통해서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요구해야 한다는 것, 책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구조적 문제일수록 그 어딘가에 내가 연루되어있다는 것이 책임에 대한 인식이다. 막연한 책임이나 미안함을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서 느꼈다. 서로 연루되어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주체가 된다. 구조가 만들어진 대로 끌려가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자유다. 자유의 출발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야 어디로 갈지 결정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다. 겉으로는 피해를 호소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에 함께 하는 것이 길일 수 있다.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몸으로 난다. 정치적 책임, 정치적 자유라는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 삶을 살아가는 것은 좌우 이전에 온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함께 한다는 것은 책임이기도 하고, 권리이기도 하다. 구조에 연루된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연대다. 지금 당장 우리보다 크게 피해나 고통을 느끼는 사람을 돕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고 싶은 대로의 구조를 만들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되돌아봐야 한다. 사람이 존엄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존엄하기 위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우리의 소중한 권리들을 맞춰가는 과정이 함께 선언해야 할 것의 핵심이다. 권리를 보장하는 방식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지만, 그 법 자체가 권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권리라고 승인하는 시민들의 힘이 권리를 보장하게 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자.

서로의 존엄을 인정하고 있는지,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