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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후기

[6월 26일 강의후기] 여성주의 관점으로 본 인권보기

[6 26일 강의후기] 여성주의 관점으로 본 인권보기

 

처음 인권의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에는 인권의 대상은 남성이었습니다. 이후에 여성 역시 인권의 범주에 들어가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있었지요. 여전히 여성인권이라는 말이 유효할 만큼 여성인권은 둘러싸고 있는 담론들은 복잡합니다.

 

미타쿠예 오야신북미 원주민의 인사말로 새울림교육센터 강시현 대표가 강의를 열었습니다. 이 인사말의 뜻은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인데요, 여성주의 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아래에 강의 내용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여성주의적 사상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를 질문하면 많은 분들이 20세기 초반 참정권 운동을 떠올립니다. 이후 반전시대에 제2페미니즘이 등장하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여성주의적 사유까지 포함하여 여성주의적 사상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메리 울스톤크래프트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영국의 작가이자 사상가였습니다. ‘여성권리의 옹호라는 책을 썼지요. 그녀가 이 책을 쓴 계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의 사상가 장자크 루소의 글 때문이었습니다. 루소가 쓴 에밀에는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 저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조차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지만, 여성은 예외다.라는 내용이 있었고, 이 내용에 반발하기 위해 여성권리의 옹호라는 책을 썼습니다. 여성도 인간이며, 이성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지요. 이는 곧 남성의 패러다임에 우리(여성)도 포함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남성패러다임 자체에는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프랑스의 올랭프 드 구즈인데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연단에 오를 권리도 있다.’라는 말을 한 사람입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했지만, 그 범주에 무산자 남성이나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당시의 인권선언을 패러디한 것이죠. 이 사람은 이후에 어떻게 됐을까요? 그녀도 처형당했습니다. 혁명의 주체였던 남성의 입장에서 자신의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읽어버린 사람이라며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 거죠.


 

 

여성참정권운동의 과정을 끔찍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했죠. 사진 속 말에 치어 죽은 여성은 에밀리 데이비슨입니다. 더비 경마대회라는 아주 유명한 대회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고 외치며 사망했습니다. 이 여성의 죽음이 세상에 보도되면서 참정권 운동은 탄력을 받았습니다. 한국은 어땠을까요? 아무런 투쟁 없이 여성참정권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이 여성운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여성인권을 보면, ‘이만큼만 사람이야.’라는 것에서 우리도 사람이야.’라고 주장했고, ‘그래, 여성도 인간으로 인정해주지.’ 식으로 억지로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적용되는 인권을 침해했을 때 나쁘다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데요, 여성인권이 침해되었을 때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성역할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과 동등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묘한 구멍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하는 명분이 있어야 했지요. 제주 4.3사건 때 서북청년단은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빨갱이를 죽였다.’라고 말했지요. 죽인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비난 받지 않고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겁니다.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은 나는 사람을 때린 것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성과 집사람은 별개의 존재라는 거죠. 남편과 아내라는 성역할에 따라 위계가 만들어지고, 집사람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다른 논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공사영역분리 이데올로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가 확실히 분리가 되나요? 실제로 두 영역은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합니다. 하지만 사적영역을 여성의 영역으로 두고 이 곳에서는 인권불가침영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비바람은 집에 들어와도 법은 집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논리죠. 집안일이지 가사노동이 아니라고 말하고, 제대를 앞둔 군인에게 사회에 나간다고 표현합니다. , 군대는 사회가 아닌 것이죠. ‘성매매여성 사회복귀방안의 표현을 자세히 보면 성매매공간은 사회로 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군대와 성매매공간은 인권의 원리가 작동되지 않는 곳이라는 얘기죠. 인권의 확장이라는 대의를 수용하는 듯 하지만 어떤 집단을 그 논리에 적용하지 않으면서 인권을 침해하는 교묘한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프라이버시권(사생활침해권)을 살펴볼까요? 이 권리는 국가라는 거대한 존재가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서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청을 하거나 개인의 시간과 공간, 삶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죠. 이것을 지켜달라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프라이버시가 누구의 프라이버시를 의미하는 걸까요? 남성에게 집은 프라이버시를 갖는 공간이지만,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화되고 성별화된 공간이 바로 집입니다. 가정폭력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았던 근거가 바로 가해 남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특정계층 이상의 남성의 인권은 지켜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인권침해의 소지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은 가정폭력을 처벌하는 법이 만들어졌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늘 사람이 죽어나가야만 법이 만들어지곤 했습니다.

 

전통/민족주의와 여성인권이 충돌할 때 역시 복합적입니다. 상대적 강자의 민족주의는 파시즘적이지만 약자의 민족주의는 인도주의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민족주의 자체가 젠더화되어 있습니다. 남편이 죽어 화장할 때 아내가 산채로 뛰어드는 인도의 관습인 사티는 영국이 인도를 식민통치하고 있을 때 야만으로 사티를 야만으로 여기고 금지시켰습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들은 사티 금지를 민족문화침탈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도남성의 목소리였지요.

 

어느 문화권에서는 여성이 성적 쾌감을 느끼는 부분인 음핵을 절개하거나 음부를 봉합하기도 합니다. 지배자들은 성을 통제하는 것에서부터 지배를 시작합니다. 음핵을 절개하고 소음순을 잘라내면 대부분은 죽습니다. 엄마들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면도칼을 듭니다. 공동체의 정당한 성원이 되는 전통이라는 이유로 말이지요. 그 전통이 인권침해라고 하면 우리의 종교, 우리 민족의 전통을 평가하고 재단하려 드느냐고 이 지역의 남성과 여성들은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목소리는 있을 것입니다. 또 어느 문화권에서는 명예살인으로 매년 5천여명의 여성이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강간당한 딸은 몸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죠. ‘명예살인을 피하기 위해 난민신청을 하기도 합니다.

 

베일을 한번 살펴볼까요? 이슬람 남성은 서구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베일을 바라봅니다. 저항은 여성을 통해 체화되고, 전통을 구현할 때에도 여성의 몸을 통해 구현합니다. 장례식이나 결혼식에서 여성은 한복을 입는 것처럼 말이지요. 베일을 벗으면 서구에 투항하는 것이 되고,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베일을 계속 쓰라고 합니다. 더 위험한 요소를 제거하는 게 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못 나오게 하는 것으로 여성을 보호한다고 합니다. 이슬람 여성에게 베일은 활동의 제한을 두고, 심리적 억압을 갖게 하며 피부병이나 사고 등의 위험에 처하게 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억압과 인권침해의 상징이지요. 하지만 사회구성원임을 드러내는 표지이면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논리에 휩싸인 사람은 베일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되지요. 하지만 우리는 왜 베일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됐는지를 봐야 합니다.

 

다양성, 무조건적 상대주의는 위험합니다. ‘차이를 모두 용인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낙태 불법화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낙태를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낙태를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비불균형의 문제로 남자들이 장가를 못 가니 낳아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가정폭력방지법의 취지에서 볼 수 있듯이 피해여성의 인권 때문에 가정폭력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유지를 위해 해결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성운동에서는 이렇게라도 법을 만들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2002년 효순 미선 사건 기억하시지요. 그 때 ‘fucking USA’라는 반미에로영화가 나왔습니다. 여중생의 희생에 분노를 느낀 한국청년이 주한미군사령관과 부시의 아내를 성 노예로 만들어 소파개정에 성공한다는 얘기를 담은 영화였습니다. 천대받은 양공주에서 순결한 민족의 딸이 된 윤금이도 있습니다. 이 분노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인권침해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은 아니었습니다. 미국남자들이 한국여자를 건들인 것이 기분이 나빴던 거지요. 진보의 가치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부분이 비어있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민족문제를 연구하는 분들이 군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대협이라는 여성주의단체에서 처음 이야기했지요. 군위안부 역시 인권침해의 문제가 아닌 민족의 수치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밀양성폭력사건 당시 경찰은 피해자에게 밀양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라며 혼냈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차별은 인권의 시각이 아니라 그 여성이 속한 남성 집단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 됩니다. 기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내 것을 기스냈으니 나도 너의 것을 기스내겠다는 논리이지요. ‘여성도 사람이야.’라는 것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성인권문제는 계속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지요. 위안부 할머니의 수기 중 왜놈보다도 모집책에게 팔아 넘긴 내 아버지가 더 밉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위안부 문제 역시 확실한 젠더의 문제입니다. 전 세계와 전 시대를 통틀어 집단강간은 있어왔습니다. 이것을 민족문제가 핵심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여성만 끌고 갔고 실제로 가부장 아버지가 팔아 넘기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민족의 수치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여성인권침해라고 정확하게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보편적 인권 개념은 양날의 칼이 되기도 합니다. 대학병원의 성폭력 가해교수를 처벌하는 것은 환자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은 수사과정에서 고문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이고, 피해 여성을 억압하는 논리로 쓰이면 안됩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의 잔혹행위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참전 용사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참전용사가 국가에 의해 동원된 피해자는 맞지만, 민간학살피해자에게 참전군인들의 인권을 이야기할 순 없습니다. 반성매매운동은 남성의 성을 살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애여성의 성욕에 대해서는 왜 이야기되지 않을까요? 혹은 장애여성이 어딘가로 끌려가서 착취당하는 것도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성판매여성이 성매매를 함으로써 인권침해 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여성혐오를 표현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포르노그래피를 만들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흑인을 야만인으로 표현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강자의 권리로 작동하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검열을 하고 형사처벌을 해야된다고 이야기하는 정부의 논리에는 동의할 순 없지만, 정부와 같은 강자가 인권을 침해하는 표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 되어야 하며 스스로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보편성은 사회적 약자에게 적용될 때 인권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성폭력을 다시 쓴다를 집필한 정희진 교수는 인권은 이미 주어져 있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투쟁 속에서 경합하는 매우 정치적으로 역동적인 가치이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말이지요.

 

소말리아 내전에 자원한 한 여성은 전쟁상태가 훨씬 살만하다. 군인으로서 음식도 배극 받고 무엇보다 남편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성에게 무엇이 전쟁이고, 무엇이 일상일까요? 그 어디든 젠더문제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시간이 부족해 성폭력, 성매매, 아내폭력 등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진행되지 못해 아쉽습니다. 후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